프란치스코 교황을 추모하며: 사랑과 겸손으로 완성된 생애
“겸손은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덜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 자신을 내려놓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2025년 4월, 인류의 양심이자 세계의 영적 지도자였던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선종하셨습니다. 고요한 시간 속에서 이 소식을 접한 많은 이들은 슬픔과 함께 깊은 묵상에 잠기게 됩니다. 한 시대를 이끌었던 위대한 이가 떠났지만, 그분의 따뜻한 가르침과 사랑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살아 숨 쉽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시작된 길
프란치스코 교황, 본명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Jorge Mario Bergoglio)는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신앙이 깊은 부모님의 품에서 자랐고, 청소년 시절에는 화학 기술자로 일하며 삶을 꾸려갔습니다.
그러나 21세의 어느 날, 성령강림대축일 미사 중에 그는 깊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날 이후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예수회에 입회했으며, 긴 수련과 학업을 거쳐 1969년 사제로 서품 되었습니다.
교육자, 사목자, 그리고 수도회 지도자로
젊은 신부였던 베르골리오는 예수회 내에서 빠르게 두각을 나타냅니다. 그는 뛰어난 지성과 함께 탁월한 영적 통찰을 갖춘 교육자로서, 신학교 학생들을 가르쳤고,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으로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늘 단순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화려하게 보이기보다는, 그늘에 있는 이들을 조용히 찾아가는 데 더 익숙한 이였습니다.
1992년,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고, 이후 대주교, 추기경을 거쳐 2013년 3월 13일, 베네딕토 16세의 뒤를 이어 교황으로 선출됩니다. 교황으로서 그는 ‘프란치스코(Franciscus)’라는 이름을 택했는데, 이는 성 프란치스코의 검소함과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을 계승하겠다는 깊은 상징이었습니다.
그에 관한 세 가지 아름다운 일화
1. 노숙인의 발을 씻긴 교황 — 세속의 벽을 허물다
2013년 성주간 목요일. 전통적으로 교황은 이 날 바티칸 성당에서 신부들의 발을 씻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상징하는 의식을 집전합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 전통을 깨고, 로마 외곽에 위치한 청소년 교정시설인 '카살 델 마르모'로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소년과 소녀 수감자 40여 명이 있었고, 그 중엔 무슬림, 정교회 신자, 무신론자까지 다양한 배경의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교황은 그들 한 명 한 명의 발을 씻기고, 수건으로 정성껏 닦아준 뒤, 조용히 입을 맞췄습니다.
교황은 말이 없었습니다. 단지 조용히 무릎을 꿇고 손을 움직였습니다. 그 순간, 소년들은 얼어붙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고,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습니다. 세상의 꼭대기에서 가장 낮은 자리를 향해 내려간 그 몸짓은, 세속의 위계와 종교의 벽을 초월한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이 일화가 전해졌을 때, 전 세계는 놀랐고, 감동했습니다. 무슬림 세계의 지도자들조차 이 장면을 '평화의 메시지'라며 찬사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종교 의례가 아니라, 교황이 말했던 “진정한 교회는 거리로 나서야 한다”는 선언의 실천이었습니다.
2. 익명의 밤 방문 — ‘신분’보다 중요한 건 ‘사람’
한겨울 로마의 밤. 대부분의 이들은 따뜻한 집 안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을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조용히 검소한 코트를 걸치고, 수행 신부 한 명만을 대동한 채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차도 없이, 이름도 숨긴 채.
그는 병원 입구에서 접수창구에 조용히 다가가 한 노인의 이름을 말합니다. 그 노인은 집도 없고, 신분도 불확실해 병원비를 지불하지 못하고 몇 주째 입원을 이어가고 있던 이였습니다. 교황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개인비서 명의의 카드로 병원비 전액을 지불하고 돌아갑니다.
며칠 후 이 사실은 병원의 한 간호사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고, 언론은 교황에게 이를 확인하려 했지만, 교황은 끝내 이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한 기자의 끈질긴 질문 끝에 남긴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프고, 도울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요.”
그날의 로마는 유난히 추웠지만, 교황의 그 조용한 밤 발걸음은 세상을 더 따뜻하게 만든 불빛이었습니다.
3. 한 소년의 눈물 — “하느님은 왜 우리 엄마를 데려가셨어요?”
2015년 1월, 필리핀 마닐라에서의 공식 일정 중. 거대한 광장에서 수십만 명의 군중이 교황을 향해 환호하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의 짧은 인사를 나누기 위해 줄을 서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허름한 옷을 입은 어린 소년이 경호원의 틈을 뚫고 교황에게 달려갑니다. 현지 고아원에서 생활하던 이 소년은 어머니를 병으로 잃고, 거리에서 쓰레기를 줍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교황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하느님은 왜 우리 엄마를 데려가셨어요?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거리에서 자는 어린이들이 있나요?”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했습니다. 교황은 소년의 눈높이까지 무릎을 꿇고, 아무 말 없이 그를 안았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 말없이 두 사람은 함께 울었습니다.
그 후, 교황은 마이크를 잡고 조용히 이렇게 말합니다.
“이 어린이는 어른들도 하지 못한 질문을 했습니다. ‘왜?’ 우리는 이 질문에 익숙하지 않지요. 하느님께 ‘왜?’라고 묻는 것이 때로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의 눈물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가르침이 됩니다.”
그날 이후 필리핀 현지 언론은 이 장면을 ‘기적의 순간’이라고 불렀고, 전 세계 수많은 이들이 이 소년과 교황의 사진을 가슴에 품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절망을 외면하지 않고, 그 절망 앞에 함께 무릎 꿇은 지도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렇게, '신의 사랑'을 사람의 눈물로 받아 안았습니다.
“가난한 이를 위한 교회”를 꿈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청의 문을 열어 거리로 나아간 교황이었습니다. 그는 이민자, 난민, 장애인, 노숙인, 감옥에 있는 이들을 끊임없이 만났고, 종교 간 대화에도 앞장섰습니다. 무슬림, 유대교, 불교 지도자들과 손을 잡으며, “평화는 대화에서 시작된다”고 외쳤습니다.
또한 그는 환경 문제에 깊이 천착하며 2015년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통해 생태적 회심을 촉구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환경 보존이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를 다시 바라보게 한 메시지였습니다.
그분이 남긴 말들
- “교회는 닫힌 성이 아니라, 열린 병원이어야 합니다.”
- “나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선한 의지를 가졌다면, 하느님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 “신앙은 도피처가 아닙니다. 신앙은 세상을 더 사랑하기 위한 용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를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요?
프란치스코 교황을 추모하는 방법은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분의 가르침처럼 일상 속에서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 서로를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는 것, 자연을 존중하고 이웃을 아끼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추모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남겨주신 따뜻한 사랑과 겸손의 유산을 가슴 깊이 새기고, 다음 세대로 전해주어야 할 때입니다. 그의 부재는 슬프지만, 그분이 남긴 길은 여전히 우리 앞에 환히 열려 있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오늘, 당신은 누구의 발을 씻기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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